
골프를 치다 보면 가끔 이런 동반자를 만납니다.
누가 드라이버를 조금 멀리 보내면 갑자기 힘이 들어갑니다.
동반자가 버디를 하면 다음 홀에서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하고, 비슷한 거리에서 한 클럽 짧게 잡는 사람을 보면 자신도 따라 짧은 클럽을 꺼냅니다.
저도 그런 마음이 전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겁니다.
같이 라운드하는 사람이 드라이버를 멀리 보내면 괜히 한 번 더 세게 치고 싶어지고, 동반자가 핀에 붙이면 저도 핀을 바로 보고 싶어지고 말이죠.
그런데 골프를 오래 치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를 쓰고 이겨야 할 상대가 정말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동반자일까?
저는 이제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골프에서 내가 상대해야 할 것은 동반자가 아닙니다.
눈앞의 코스이고, 바람이고, 경사이고, 그날의 컨디션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것은 내 안에서 계속 고개를 드는 욕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생각을 하다 보면 오래된 한 문장이 떠오릅니다.
知彼知己 百戰不殆.
손자병법의 유명한 구절, 지피지기 백전불태입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한 글자
흔히 이렇게 말합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다.”
또는 ‘백전불패’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손자병법의 원문은 조금 다릅니다.
知彼知己 百戰不殆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긴다’가 아니라 ‘위태롭지 않다’**는 표현이 참 재미있습니다.
골프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18홀 내내 버디를 잡을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홀에서 동반자보다 멀리 칠 필요도 없고, 매번 핀에 가장 가까이 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때로는 파로 지나가면 되고, 어려운 홀에서는 보기로 막아도 됩니다.
한두 번의 화려한 샷보다 큰 사고 없이 18홀을 지나가는 것이 좋은 스코어를 만드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러고 보면 ‘백전불태’는 아마추어 골퍼에게 꽤 훌륭한 전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골퍼의 적은 동반자가 아니다
골프는 참 독특한 운동입니다.
축구나 테니스처럼 상대방의 플레이를 직접 방해하지 않습니다.
동반자가 250m 드라이버샷을 날렸다고 해서 제 공이 10m 짧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동반자가 버디를 했다고 해서 제 파가 보기로 바뀌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상하게 옆 사람의 플레이에 영향을 받습니다.
“저 사람도 드라이버 쳤는데 나도 쳐야지.”
“저 사람은 8번 아이언인데 내가 7번을 잡기는 좀 그런데.”
“여기서 저 사람이 핀을 노렸는데 나도 한번 붙여봐야지.”
바로 이런 생각들입니다.
그런데 상대 골퍼의 비거리와 제 비거리는 다르고, 구질도 다르고, 잘 치는 클럽도 다릅니다.
무엇보다 그 사람이 친 공과 제가 지금부터 칠 공은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골프에서 동반자는 경쟁자가 될 수는 있어도 싸워야 할 적은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코스를 걷고, 좋은 샷에는 박수를 보내고, 서로의 플레이를 존중하는 것이 골프라는 운동이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반자를 이기려고 무리하기 시작하면 정작 봐야 할 것을 못 보게 됩니다.
바로 코스입니다.
그렇다면 골프에서 ‘적’은 무엇일까?
손자병법식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피(知彼), 즉 상대를 안다는 것은 골프에서는 무엇일까요?
저는 코스를 읽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티박스에서 보이는 페어웨이의 폭.
드라이버 낙하지점에 기다리고 있는 벙커.
그린 앞의 해저드.
핀 뒤쪽의 내리막.
러프의 상태.
그리고 바람.
같은 홀도 날씨에 따라 전혀 다른 코스가 됩니다.
평소 150m를 보내는 클럽이 맞바람에서는 부족할 수 있고, 내리막에 뒷바람까지 불면 평소보다 훨씬 멀리 갈 수도 있습니다.
비가 내리면 런이 줄어들고, 그린이 단단한 날에는 평소와 같은 캐리로 쳐도 공이 그린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제가 상대해야 할 ‘적’입니다.
그런데 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공격해서 이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어디에 위험이 있는지 알고 피하면 됩니다.
그게 바로 백전불태에 가까운 골프라고 생각합니다.
지기(知己), 코스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나 자신이다
그런데 손자병법에서는 상대만 알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 자신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게 골프에서는 더 어렵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최대 비거리는 잘 기억합니다.
드라이버가 아주 잘 맞았을 때 230m가 나갔다면 어느 순간 자신의 드라이버 거리는 230m가 됩니다.
7번 아이언이 한 번 150m 나갔다면 150m 클럽으로 생각하게 되고 말이죠.
하지만 코스에서 필요한 것은 최대 거리가 아니라 평균적으로 성공시킬 수 있는 거리입니다.
드라이버가 잘 맞으면 230m를 보내지만 평소에는 210m 정도라면 코스 공략은 210m를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오른쪽 미스가 자주 나온다면 그것 역시 내 골프의 일부입니다.
롱아이언보다 유틸리티가 편하다면 굳이 다른 사람의 클럽 선택을 따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이걸 인정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머리로는 안전하게 쳐야 한다는 걸 알면서 티박스에 올라가면 또 드라이버를 잡고 싶습니다.
핀을 직접 노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면서 핀이 보이면 또 한번 붙여보고 싶고 말이죠.
그래서 어쩌면 골프에서 가장 어려운 지기(知己)는 내 비거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욕심을 아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코스 설계자는 골퍼의 욕심을 이용한다
코스를 조금씩 공부하면서 재미있어진 부분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벙커가 그냥 벙커였습니다.
지금은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왜 하필 저기에 만들어 놨을까?”
드라이버가 잘 맞았을 때 떨어질 만한 곳에 벙커가 있습니다.
짧은 파4에서는 그린이 보이기 때문에 공격하고 싶게 만들어 놓고, 그 주변에는 실패했을 때 대가를 치르게 하는 위험지역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핀도 마찬가지입니다.
넓은 그린 한쪽 끝, 바로 옆에 벙커가 있는데 핀이 꽂혀 있으면 자꾸 그쪽을 보고 싶어집니다.
설계자는 아마추어 골퍼에게 “여기로 한번 쳐봐”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문제는 거기에 넘어가느냐는 겁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코스 매니지먼트입니다.
핀을 보면서도 그린 중앙을 선택할 수 있고, 드라이버를 치고 싶으면서도 3번 우드를 선택할 수 있는 것.
저는 이런 선택이 좋은 스윙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동반자와 경쟁하기 시작하면 내 골프를 잃는다
라운드에는 당연히 경쟁의 재미도 있습니다.
친구들과 스코어를 비교하기도 하고 작은 내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 자체가 잘못됐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문제는 경쟁 때문에 자신의 전략을 버리는 순간입니다.
동반자가 드라이버를 멀리 보냈다고 평소보다 세게 휘두르고,
동반자가 핀을 직접 노렸다고 나까지 위험한 핀을 노리고,
한 홀을 잃었다고 다음 홀에서 무리하게 만회하려고 하는 순간이 그렇습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나는 코스와 골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의 스코어와 골프를 하고 있게 됩니다.
저도 라운드를 마치고 나서 후회하는 샷을 떠올려 보면 미스샷보다 이런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왜 거기서 그렇게 무리했지?”
몰라서 한 선택이 아닙니다.
알면서도 욕심 때문에 한 선택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좋은 코스 공략이란 대단한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골프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세운 원칙을 지키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골프의 ‘지피지기’
지피(知彼).
코스를 봅니다.
벙커와 해저드가 어디에 있는지, 바람은 어떻게 부는지, 어느 방향으로 미스하면 다음 샷이 어려워지는지를 봅니다.
그리고 지기(知己).
나를 봅니다.
오늘 드라이버가 어떤지, 아이언 거리는 어느 정도인지, 어떤 미스가 반복되고 있는지 확인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를 더 봅니다.
내 욕심입니다.
이 세 가지를 알고 플레이하면 반드시 버디를 많이 잡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스스로 경기를 무너뜨릴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바로 백전불태(百戰不殆)입니다.
스코어를 줄이고 싶다면 상대부터 바꿔보자
다음 라운드에서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옆 사람이 드라이버를 얼마나 멀리 보내는지가 아니라 내 공을 어디에 보내야 다음 샷이 편한지.
동반자가 어떤 클럽을 잡았는지가 아니라 오늘 내 거리에는 어떤 클럽이 맞는지.
누가 버디를 했는지가 아니라 이 홀에서 내가 피해야 할 곳이 어디인지.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라운드가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동반자는 이겨야 할 적이 아니라 함께 하루를 즐기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진짜 상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코스.
바람.
경사.
그날의 내 컨디션.
그리고 욕심.
골프를 오래 칠수록 저는 이 말의 의미가 조금씩 다르게 들립니다.
知彼知己 百戰不殆.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18홀 동안 모든 홀을 이길 필요는 없습니다.
무너지지 않으면 됩니다.
어쩌면 그것이 스코어를 줄이는 가장 현실적인 골프 전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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